황상민 교수의 신작 <독립연습 : 서른이 넘으면 자기 마음에 책임을 져야 한다>은 이론서가 아니라 철저히 Case Study이다. 라디오 <김어준의 색다른 상담소>에서 여러 청취자들의 고민을 듣고, 심리적 진단과 해결책을 제시해 주던 것. 20여년간 심리학 교수 생활을 하면서 상담한 여러 학생, 사람들의 사연들로 이루어져있어서 쉽고도 친근했다.

<독립연습>에서 다룬 여러 이야기들은 주로 가족, 진로, 취업, 사랑, 결혼, 인간관계, 사회생활 등... 2,30대 젊은사람들의 고민들이었기에 어렵지 않게 그들의 고민에서 '나의 고민, 나의 모습' 또한 찾을 수 있었다.

<독립연습>에서의 황상민 교수의 문체는 날이 섰다. 동생이자 후배인 우리들의 고민과 걱정에 대해, "본인 스스로,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가치를 중요시하는지도 모르는채 위로를 받고 핑계거리를 찾고있다."라고 비판한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식의 위로와 변명이 아닌 진짜 나를 찾기 위한 조언과 실 사례들로 돌직구를 던진다.

 

인상 깊었던 Quotes

누구도 나를 독립시켜주지 않는다. 독립은 스스로 하는 거다. 내가 선언하고 내 발로 걸어 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내 문제를 정확히 볼 수 있어야 한다. 문제를 오래도록 들여다보면 문제 뒤에 숨은 내 모습이 보인다. 아무리 시간이 오래 걸리고 고통스럽더라도 반드시 나를 만나야 한다. 나를 만나야 비로소 내 인생을 시작할 수 있다.

 

우리는 비교의 늪에 빠져 만족을 잃어버렸다. 일찍이 카를 마르크스는 인간의 이런 심리를 기막히게 꼬집었다. "집의 크기는 중요치 않다. 집 옆에 궁전이 들어서면 그 집이 오두막으로 변해버리니까." 만족을 잃은 우리는 '나'를 마음속 깊이 처박아버렸다. 내가 없는데, 내 욕구를 모르는데 대체 무엇으로 내가 행복을 느낄 수 있겠는가. 우리의 불행은 바로 나를 감춘 데 있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과 거리를 둔 채 삶의 한가운데에서 길을 읽고 헤맨다. 무언가를 믿고 의지하며 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수록 바로 그 '무언가'를 찾지 못해 방황한다. 내 고통은 천근만근이지만 다른 이의 아픔은 새털처럼 가벼워 보이기도 한다. 그렇게 삶이 힘들 때 사람들은 위로받을 '대상'을 찾는다. 인간의 마음을 다루는 학문인 심리학이 인기를 끄는 건 그래서다. 어느 새 심리학은 외롭고 불안한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들어 무소불위의 멘토가 되었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내가 발견한 한국인의 유별한 특성은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지금보다 나은 나'에 집착한다. 미국인은 태어나면서부터 '나'로 살아간다. 무얼 먹고 싶은지, 무얼 하고 싶은지, 누구를 좋아하는지 등 살면서 부딪치는 숱한 질문에 당당히 '나'를 앞세워 대답한다. 얄미울 정도로... 우리는 어떤가?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에서도 알 수 있듯이 튀면 안된다는 의식에 젖어있다. 좋은게 좋은거고, 유행에 맞춰 옷을 입고, 남들이 주문하는 것을 따라먹고, 부모님이 좋아하는 직업을 선택하는 것이 그 전형이다. 우리가 그럴듯한 삶, 썩 괜찮은 성공이라고 믿는 것은 정말로 그럴듯하고 괜찮은 걸까? 혹시 사회적 안전지대에 숨어 '나'를 버리고 정신적으로 비루한 삶, 못난 인생을 살며 '괜찮다, 괜찮다'고 위안을 삼는 것은 아닐까? 과거는 길고 깊은 시간의 늪이다. 그 과거에서 원인을 찾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 쉽고 안전하다. 과거 속에는 우리가 겪는 수많은 문제를 그럴듯하게 설명해주는 모든 것이 잠자고 있다. 우리는 과거를 헤집어 그럴싸한 것들을 꺼내들고 "아, 바로 너 때문이었어. 네가 이렇게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데 내가 뭘 어찌할 수 있겠니?" 한다. 기가 막힌 핑계거리를 찾아내 트라우마한테 덮어씌우는 거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은 "인간은 미래가 불확실할 때 비합리적이고 편향적인 사고로 판단한다"고 말했다. 정말 놀랍지 않은가. 우리는 지금껏 인간은 합리적인 사고를 한다고 배워왔다. 카너먼은 우리의 고정관념을 정면으로 들이받는다. 마음이 불안할 때 사람은 손해를 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점점 더 비합리적인 판단을 한단다. 두려워하는 마음이 엎친 데 덮치는 상황을 불러온다는 얘기다.

 

우리 사회에는 열심히 공부해서 어떤 학교에 가야 하는지, 몇 살에 결혼을 하고 아이는 몇 명을 낳아야 하는지 등 암묵적으로 정해놓은 규칙 같은게 있다. 물론 지키거나 말거나지만 대다수가 그 규칙을 행복의 기준인양 믿는다. 많은 사람이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통념은 마치 미신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조종한다. 그 통념을 믿고 통념대로 따라가려 애를 쓰는 동안,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자기 삶을 어렵게 만든다. 특히 피해의식이 있는 사람은 미신 같은 통념에 맹목적으로 매달린다.

 

사람들은 대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자신이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도 잘 모른다. 또한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는 것조차 잘 모른다. 자신이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 모른다는 것 역시 알지 못한다. 자신을 모르고 자기가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도 모르는 채 짝을 고른다. 어떤 사람에게 내 마음이 끌리는지 모르니 당연히 당황스럽다. 누구를 선택해야 할지 몰라 헷갈릴 때 사람들은 그 선택 기준을 조건으로 바꿔 따져본다. 좋아하는 사람을 알아보기 어렵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쉬운 조건을 들이대는 것이다. 흔히 조건이 맞으면 서로 맞는다고 생각한다. 사실은 조건을 좋아하는 것이면서 그사람을 좋아하는 거라고 착각한다. 어리석은 착각은 어리석은 판단을 낳고 그것은 어리석은 결혼으로 발전한다. 재앙 그 자체다. 지금 돈이 있는 남자와 아내를 굶기지 않을 남자를 판단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지금 있는 돈은 대개 남자의 것이 아니라 그 아버지의 것이다. 부자가 자기 재산을 아들에게 물려주어 부의 대를 이을 확률은 채 20퍼센트도 되지 않는다. 지금 부자로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부자 아버지를 둔 사람이 아니다. 현재 많은 조건을 갖추었다고 해서 그것을 결혼생활 내내 유지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래서

푸념처럼 늘어놓는 이야기 중, "우리나라 교육제도가 학생 본인의 적성이나 가치관 형성에 도움이 안된다. 대학가서 군대 다녀와야 정신 차린다는게 슬픈 소리다." 라는 말. 나 스스로와 대화를 자꾸 나누고, 개똥철학일지라도 자신만의 신념과 인생관을 가질 시간이 우리 한국사람들에겐 절실하게 필요하다. 남들은 어떻게 사는지 그만 좀 쳐다보고, 이게 내 삶인지 아닌지 멍 때리는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 좀 그만해야된다는 거다(알긴 알지만 쉽진 않다, 잘 했으면 싶다).

죽는소리 그만하고, 이 직장의 내 커리어가 옳은 길일까? 내가 만나는 지금 여자친구가 내 결혼 대상일까? 이런 고민은 나만의 스타일대로 짧고 심플하게 가져가야겠다. 남들의 시선과 조언, 사회적 통념은 말그대로 그들의 생각일 뿐이다. (라고 마음먹게 만들어주는 <독립연습>)

 

Fine. xt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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