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베스트 셀러' 작가 김정운 교수를 있게 한, 뭇 남성들을 설레게하는 제목으로, 제목만큼 번뜩이는 내용들로 호평 받은 책.

나도 대한민국 남자로서 서글플 때도, 우울 할 때도, 억울 할 때도 있다. 김정운 교수의 '진단'은 그 슬픔을 달래주는 달달한 커피 한 잔 기분 전환이다. 살짝 안타까운 부분은, 김정운 교수가 본인의 에피소드를 기반으로 여러 상황들이나 이론들을 설명하기를 좋아해서, 여러 저서들이나 강연, 방송에서 동일한 내용이 반복되다보니(어쩔 수 없긴 하지만) 약간 질리기 시작했다는 것. 그래도 여전히 김정운 교수 특유의 허허실실 통찰력은 유쾌하다.

 

매번 북 리뷰를 포스팅 할 때, 점점 소회보다 필사한 일부 인상적인 내용만 기록하는 것 같아서 스스로 안타깝다. 긴 글을 적는다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진다!

인상적이었던, 공유하고픈 Quotes

 

행복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행복을 구체적으로 '정의'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직접 느낄 수 있게 정의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전문 용어로 '조작적 정의(operational definition)'라고 한다. 행복을 구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고 반복 가능한 방식으로 설명하는 것을 뜻한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프린스턴 대학의 다니엘 카네만(Daniel Kahneman)교수는 행복을 아주 '심플하게' 정의한다. 행복이란 '하루 중 기분 좋은 시간이 얼마나 되는가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기분 좋은 시간이 길면 길수록 행복하고, 기분 좋은 시간이 짧으면 짧을수록 불행한 것이다. 아주 기막힌 행복의 조작적 정의 아닌가.

 

닐 로즈(Neal Roese)교수에 따르면 '행한 행동에 대한 후회'와 '하지 않은 행동에 대한 후회'의 결정적 차이는 '시간'이라는 것이다. '행한 행동에 대한 후회'는 '최근'에 일어난 일과 관련되어 있는 반면, '하지 않은 행동에 대한 후회'는 '오래전'에 일어난 일과 관련되어 있다. 뒤집어 말하면,'하지 않은 행동에 대한 후회'는 오래가는 반면, '행한 행동에 대한 후회'는 바로 끝난다는 이야기다. 남자들은 '하지 않은 행동'에 대한 후회를 훨씬 더 많이 하는 반면, 여자들은 이미 '행한 행동에 대한 후회'를 훨씬 더 많이 한다는 것이다. 예를들어 남자들은 "그때, 그 여자와 바로 관계를 가질걸..." 후회하고, 여자들은 "그 남자와 좀 더 나중에 관계를 가질 걸..." 하는 후회를 많이 한다는 것이다. 여자들이 "그 때 그남자와 관계를 가졌어야 했는데..."하며 후회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여자들의 후회는 그래서 짧다. '하지 않은 행동에 대한 후회'보다 '행한 행동에 대한 후회'를 더 많이 하기 대문이다. 그래서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스트레스 상황에 훨씬 더 잘 적응하고, 남자들보다 훨씬 더 오래 사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기억력 쇠퇴의 반대급부로 얻어지는 지혜는 '선택의 범위를 줄이는 능력'이다. 젊을 때는 모든것이 풍부하고 선택의 범위가 넓을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이가 들게 되면, 선택의 범위가 넓다고 반드시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불필요한 것은 아예 기억에서 지워버린다.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설명이 필요한 경우를 잘 살펴보면, 대부분 사안을 비판적으로 분석할 때다. 현실의 내 삶이 만족스럽고 내 결정에 불만이 없을 경우에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분석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다. 토끼를 잡는 노련한 사냥꾼은 어떻게 토끼를 잡았는지 잘 설명하지 못한다. "어떻게 하다 보니 잡히더라"는 식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토끼를 놓친 사냥꾼은 설명이 많다. "토끼는 뒷다리가 길어 언덕을 빨리 올라가 도무지 쫓아갈 수 없었다" 등등. (완전 초공감! 학교 다닐 적에 절대 A+ 받은 친구/선배들에게 그 수업 어땠는지 물어보지 말고, C+ 받은 사람에게 수업에 대해 물어볼 것이라는 내 경험담과 똑같다!)

 

독일 최고의 두뇌집단이 모여 일하는 막스플랑크 연구소의 게르트기거렌처(Gerd Gigerenzer) 소장은 아예 한발 더 나아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줄 것이라고 믿고 있는 '합리성과 논리성에 근거한 판단'이 오히려 실패할 확률도 높고 결과적으로 우리를 불행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직관과 느낌에 근거한 지혜로운 판단을 내릴수록 우리의 삶은 더 살 만한 것이 된다는 이야기다.

 

비밀번호가 중요한 세상. 하루에서 몇 번 씩 사용하는 그것을 원칙없이 정했다가는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그래서 우리는 비밀번호를 기억하기 쉬운 생일이나 자동차 번호, 애인 전화번호 등으로 정한다. 이 과정을 심리학에서는 메타코그니션(Meta-cognition)이라고 한다. 즉 '생각에 대한 생각'이다. '은행 비밀번호를 생일로 정하면 내가 기억을 잘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 대한 생각'은 자신을 돌이켜 보는 자기반성 능력의 심리학적 기초가 된다. 나에 대해 반성적 거리를 두고 바라보며 판단하는 능력인 것이다. 사람은 바쁠수록, 정신 없으면 없을수록, 자기반성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멀쩡하던 사람이 한순간에 형편없이 망가지는 까닭은 메타코그니션 능력이 상실되기 때문이다. 높은 자리에 올라갈수록, 사회적 성취가 크면 클수록, 반성적 거리는 사라진다.

 

행복하면 죄의식을 느끼고, 재미있으면 불안해지는 각 개인들이 한국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다. 휴일에 잠시 낮잠만 자고 일어나도 뭔가 찝찝하다. '이렇게 쉬어도 되는 건가.' 싶은 것이다. 가족에 대한 책임감에 아이들과 함께 나선 놀이터에서도 손으로는 휴대폰을 연신 만지작거린다. 인터넷까지 접속되는 신형 휴대폰으로 업부 관련 기사 검색까지 한다. 아, 이것도 정말 아니다. ... 21세기를 20세기적으로 경영하는 한국식 언밸런스의 압권이 바로 '아침형 인간'이다. 사는게 재미있으면, 일하는게 재미있으면, 근면 성실하지 말라고 해도 근면 성실해진다. 순서를 바꾸라는 이야기다. 21세기에는 '지금' 행복한 사람이 '나중에도' 행복하다. 지금 사는게 재미있는 사람이 나중에도 재미있게 살 수 있다. 노동기반사회의 핵심원리가 근면 성실이라면, 지식기반사회를 구성하는 핵심원리는 재미다. 창의적 지식은 재미있을 때 만 생겨난다.

 

관점의 즐거움. 여행, 사진, 영화에서 알 수 있듯 인간은 관점의 유희를 즐기는 존재이다. MS OS가 윈도우즈 인 것도 우연이 아니다. 이 창문을 통해 남의 은밀한 세계를 훔쳐본다. 타인의 블로그, SNS. 훔쳐볼 뿐만 아니라 드러내기도 한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자신의 삶을 블로그에 올린다. 사진도 올린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아주 은밀한 내용까지도 모두 올린다. 이런 행위는 자신의 삶을 드러내어 타인의 시선을 즐기는 행위다. 바바리 맨의 사이버적 형태라고나 할까? 관점의 발견에서 시작된 재미가 21세기에 들어서면서 훔쳐보기와 드러내기의 이중적 구조로 진화한 것이다.

 

서양인들에게 타인의 존재는 항상 '나'의 상대방으로서의 '너'다. 동등한 주체로서의 상대방에 대한 무례함은 곧 '나'라는 주체에 대한 부정이 된다. 그래서 그들은 매너가 좋고, 생판 모르는 사람과도 곧바로 안부를 물을 수 있다. 한국인의 상호작용의 양상은 사뭇 다르다. '나'와 '너'라는 상호주체의 만남은 무엇보다 먼저, '우리'와 '남'이라는 경계선을 넘어야만 가능하다. '남'은 상호작용의 주체가 될 수 없다. '우리'라는 경계선을 넘어서는 순간부터 상대방은 '너'라는 가치를 갖게 된다. 서구인들에게는 '나'와 '너'가 만나 '우리'가 성립된다면, 한국인들은 '우리'가 먼저 만들어지고 난 후에 비로소 '나'와 '너'가 성립된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발견하고 공부하는 것과 더불어, 내 안의 심리적 상태를 끊임없이 성찰 할 수 있어야 한다. 정말 행복하기 위해서는 '쉬는 것'과 '노는 것'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은 자신이 유지해야 하는 적정 각성수준이 있다. 가장 상쾌하고 즐거운 기분이 유지되는 심리적 상태를 뜻한다. 아침에 커피를 마시며 일정한 각성수준을 유지하는 것처럼, 우리가 편안함을 느끼는 일정한 심리적 각성수준이 있다. 적정 각성수준을 유지해야 하는 이유는 외부자극과의 적절한 긴장관계를 유지하며 내면의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만약 외부의 자극이 내가 즐거움을 느끼는 각성수준보다 높으면 스트레스를 받거나 불안해진다. 이때는 쉬어야 한다. 만약 외부의 자극이 너무 낮으면 지루하거나 심심해진다. 이때는 놀아야 한다.

 

예술을 통한 가장 중요한 정서적 경험을 독일의 철학자 임마뉴엘 칸트는 '장엄함'이라고 했다. 감탄은 숭고함과 장엄함의 구체적 반응이다. 삶의 가장 궁극적 경험이 우리에게 와 닿는 유일한 통로가 바로 감탄이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어머니는 자신의 아이를 감탄으로 양육한다. 우리가 인간이 된 것은 엄마의 감탄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끝없이 감탄해야만 한다. 죽을 때까지 누구로부터든 감탄을 받아야만 한다. 식욕, 성욕은 인간의 본질적 욕구가 아니다. 감탄이 인간의 본질적 욕구다. 그래서 인간 문명이 생긴 것이다.

 

김정운 교수의 안식년이 기다려진다. 더불어 삼청동에 갈 때마다 생각나는, 와인바에서 미녀들에 둘러쌓여 웃던 그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지금 즐기고 행복해야, 나중에도 재밌을 수 있다. Andante con moto.

Fine. xthy.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