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위안: 불안한 존재들을 위하여>

'알랭 드 보통'이 '철학'으로 '불안한 존재'들에게 '위안'을 준다는 제목 자체만으로 매력이 철철 넘쳤다.

진지한 제목과 달리 책 목차를 보고 '빵' 터졌다. 저 '존재'들에게 위안이 필요할 수 밖에 없겠구나 싶다.

  • 인기 없는 존재들을 위하여
  • 가난한 존재들을 위하여
  • 좌절한 존재들을 위하여
  • 부적절한 존재들을 위하여
  • 상심한 존재들을 위하여
  • 어려움에 처한 존재들을 위하여

 

위대한 '천재' 철학자들도 다 똑같은 고통스런 삶을 살아간 인간이었다.

각 챕터 별로 소크라테스, 에피쿠로스, 세네카, 몽테뉴, 쇼펜하우어, 니체의 생애와 저작에 나타난 사상, 작가인 알랭 드 보통의 생각을 적절히 버무렸다. 내용이 다른 철학 입문서들 보다는 쉽다. 각 철학 사상에 대해 체계적으로 접근하거나 학문적인 이야기를 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불안한 내 상황, 현상'에 대해 철학자들은 어떻게 행동했고 생각했는지를 빗대어 보여주기 때문에 좀 더 친밀하다. (그래도 아직 어려운 건 사실. 한 문장을 읽고 다시 읽으며 곱씹어야 이해가 되는...)

개인적으로는 인기 없는 존재들을 위하여(소크라테스), 가난한 존재들을 위하여(에피쿠로스) 챕터가 특히 좋았고, 상심한 존재들을 위하여(쇼펜하우어)와 어려움에 처한 존재들을 위하여(니체)에서는 잘 몰랐던 내용을 알 수 있어서 새로웠다. (두 철학자들의 행복하지 않은 생애, 처절했던 말년 등...)

 

알랭 드 보통이 과거 저서에서 '사랑', '불안', '여행', '건축' 등에 연구자 적인 입장으로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통찰을 보여줬다면, <철학의 위안>에서는 철학자들의 생애를 통해 독자들에게 '너네들이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거, 과거에 철학자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해결해나갔다... 기운 내'라는 메세지를 준다.

소크라테스도 외로웠구나, 에피쿠로스는 참 검소하고 작은 것에서 행복을 느꼈구나, 쇼펜하우어는 염세주의는 어릴적 불행한 투정에서 시작됐구나, 항상 비 주류에서 어렵게 살았구나... 다 똑같구나... 라는 위안이랄까.

 

가슴에 남은 몇 가지 내용들

철학(Philosophy)는 필로(philo, 사랑)와 소피아(sophia, 지혜)라는 단어의 그리스어가 어원

 

인기 없는 존재들을 위하여 (소크라테스)

(알랭드 보통의 이야기) 타인과 대화할 때 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진실을 밝히는 것보다는 상대방의 호감을 사는 것이다. 타인을 즐겁게 해주려는 욕망에 휘둘려 나는 마치 학예회날 학교를 찾은 학부모처럼 그다지 우습지 않은 농담에도 크게 웃는다. 낯선 사람과 함께 있으면 나는 돈 많은 손님을 맞는 호텔 수위처럼 노예 같은 태도를 취하는데, 이는 호의를 얻으려는 무분별한 욕망에서 비롯된 행동이다. 나는 대다수 사람들이 신봉하는 관념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의문을 품지 않았다. 나는 권력을 쥔 인물의 동의를 추구했으며, 그들과의 만남이 있은 후에는 그들이 나를 어떤 존재로 받아들일지 노심초사했다. 세관을 통과하거나 경찰 순찰차와 나란히 차를 달릴 때면, 내 마음 밑바닥에는 어느새 제복을 입은 저 공무원이 내게 호감을 가져주었으면 좋으련만 하는 바람이 자리잡았다.

소크라테스는 짧은 시간에 돈과 영향력은 그 자체로는 미덕의 필요충분조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메논에게 논증했다. 부유한 사람은 존경을 받을 수는 있지만, 그 존경은 어디까지나 그들이 부를 축적한 방식에 달려 있다. 빈곤이 그 자체로 한 개인의 도덕적 가치의 한 자락을 들추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부유한 사람이 자신의 재산을 보면서 자신의 미덕을 증명해줄 것이라고 단정할 아무런 이유가 없듯이, 가난한 사람도 자신의 궁핍을 악행의 신호로 생각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너무도 명백한 것이라거나 "당연한" 것으로 선언된 것들 중에서 실제로 그런 것은 거의 없다. 이런 사실을 인정하면, 우리는 이 세상도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유연하다는 진리를 배우게 될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기존의 확고한 견해들도 완벽한 추론 과정을 통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종종 몇 세기에 걸친 지적 혼란 상태에서 나타났기 때문이다. 모든 것들이 현재의 모습 그대로여야 할 이유는 결코 없다.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일들을 게을리 해왔소. 돈을 버는 일, 재산을 관리하는 일, 군대나 일반 시민들로부터 존경을 받거나 권력 있는 자리를 차지하는 일, 아니면 오늘날 여러 도시에서 조직된 정치적 모임이나 정당에 가입하는 일 등이 그것이오. 하지만, 나는 아테네 시민 모두가 정신적, 도덕적 행복보다 실용적 이점을 앞세우지 않도록 설득하려고 노력해왔소.

소크라테스의 죽음에는 우리로 하여금 옳지 못한 명분을 품게 할 수 있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 사건은 자칫 많은 사람들에게 다수의 미움을 사는 것과 옳은 것의 관계에 대한 감상적인 믿음을 조성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초반에 오해를 받았다가 훗날 리시포스가 제작한 동상으로 보상을 받는것이 마치 천재와 성인의 운명처럼 비칠 수도 있다. 우리 대부분은 천재도 아니고 성인도 아니다. 우리가 만약 다른 사람들로부터 잘못되었다고 비난받을 때 무조건 자신이 옳다는 식으로 어린아이처럼 고집을 부린다면,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이야기에서 거부의 정당한 명분보다는 단순히 거부하는 자세를 미화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가난한 존재들을 위하여 (에피쿠로스)

"만약 미각의 쾌락을 빼앗고, 성적 쾌락을 빼앗고, 듣는 쾌락을 빼앗고, 또 아름다운 형태를 볼 때 일어나는 달콤한 감정들을 빼앗는다면, 나는 행복의 본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

진정한 친구들은 절대로 우리를 세속적인 잣대로 평가하지 않으며, 그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우리의 내면적인 자아이다. 이상적인 부모처럼, 우리를 향한 친구들의 사랑은 우리의 외모나 사회적인 지위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친구 앞에서는 낡은 옷을 걸치거나, 올해는 돈을 거의 벌지 못했다는 사실을 밝히면서도 전혀 불안을 느끼지 않는다. 아마 부에 대한 욕망도 호화로운 생활을 향한 단순한 갈증으로만 이해해서는 곤란할 것이다. 더 중요한 동기는 다른 사람의 좋은 평가를 받고 싶고 훌륭한 존재로 대접받고 싶은 마음일 수도 있다.

"현명한 사람은 가장 많은 양의 음식이 아니라 가장 맛있는 음식을 선택한다."

삶이 지속되지 않을 죽음 이후에는 전혀 무서워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이해한 사람에게는 삶 또한 무서워 할 것이 하나도 없다.

에피쿠로스가 펼쳤던 주장은, 만약 우리에게 돈은 있는데 친구와 자유, 사색하는 삶이 없다면 우리는 결코 진정으로 행복할 수 없을 것이고, 비록 부는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친구와 자유, 사색을 누린다면 우리는 결코 불행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행복에 필수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

  • 자연스럽고도 필요한 것: 우정, 자유, 사색, 의식주
  • 자연스럽기는 하지만 필요하지 않은 것: 좋은 집, 개인용 목욕시설, 연회, 하인, 생선, 육류
  • 자연스럽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은 것: 명성, 권력

값비싼 물건들이 크나큰 기쁨을 안겨주지 못하는데도, 우리가 그런 것들에 그렇게 강하게 끌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따로 있는데도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할 때에 그럴듯한 해결책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물건들은 우리가 심리적 차원에서 필요로 하는 어떤 것들을 마치 물질적 차원에서 확보하는 듯한 환상을 준다.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다시 정리할 필요가 있는데도 그렇게 하지는 않고, 새로운 물건이 진열된 선반으로 끊임없이 이끌린다. 우리는 친구들의 우정 어린 충고 대신에 캐시미어 카디건을 구입한다.

 

좌절한 존재들을 위하여 (세네카)

분노보다 더 신속히 광기에 이르는 길은 없다. 분노한 많은 사람들은 마치 미친 사람이 자신의 광기를 부인하듯이 자신이 분노에 떨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면서, 자식들을 죽어라 꾸짖고, 자신을 정신박약자로 끌어내리고, 가정에 저주를 퍼붓는다.지나치게 높은 기대를 포기하기만 하면 우리가 그렇게 분노하는 일은 없어질 것이다.

근심이란 불확실한 상황에서 심리적 동요를 느낀느 상태를 말하는데, 이런 경우 당사자의 마음에는 어떤 일이 최선의 결과로 끝났으면 하는 바람과, 최악의 결과로 끝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교차하게 된다. 짐작컨대 근심에 빠진 사람은 당연히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문화적, 성적, 사회적 행위에서도 즐거움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심지어 더없이 완벽한 환경에서도 노심초사하는 사람은 자신의 파멸을 곰곰이 생각하느라고 혼자 빈방에 처박혀 있기를 좋아할 수도 있다.

만약 자네가 모든 근심을 날려버리기를 원한다면, 자네가 두려워하고 있는 그 일이 반드시 일어나고 말 것이라고 생각하게

삶의 단편들을 놓고 흐느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Quid opus est partes deflere?) 온 삶이 눈물을 요구하는 것을. (Tota flebilis vita est.)

 

부적절한 존재들을 위하여 (몽테뉴)

은퇴 이후 그것(독서)이 나를 위로한다. 독서는 괴롭기 짝이 없는 게으름의 짓누름으로부터 나를 해방시켜준다. 그리고 언제라도 지루한 사람들로부터 나를 지켜준다. 통증이 엄습할 때도 그 정도가 매우 심하거나 극단적이지만 않다면, 그 날카로운 예봉을 무디게 만든다. 침울한 생각으로부터 해방되려먼 그냥 책에 의지하기만 해도 된다.

가장 행복한 삶은 생각 없이 지내는 것이다.

자신이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보았는가? 그런 사람보다는 차라리 미친 사람에게 희망을 거는 것이 낫다.

인간에게는 불확실성을 빼고는 확실한 것은 하나도 없다. 인간보다 더 비참하거나 오만한 것은 없다. 인간이 이해하기에는 모든 것이 너무 복잡하다.

 

상심한 존재들을 위하여 (쇼펜하우어)

천재성을 타고난 사람은 좀처럼 사교적이기가 어려운데, 그 어떤 대화가 자신의 독백만큼 실로 지적이고 유쾌할 수 있겠는가?

사랑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다음세대의 구성을... 이를테면 앞으로 다가올 시대에 인간 종의 존속과 특별한 구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사랑이란 것은... 성적 관계는 별도로 하더라도, 혐오스럽고 경멸할 정도이고 심지어 상극으로까지 보이는 사람에게도 자신을 맡기게 한다. 그러나 종(種)의 의지가 개인의 의지보다 훨씬 더 강하기 때문에 그 연인은 자신의 특질과 상반되는 모든 특질들에 눈을 감아버리고 모든 것을 간과하고 모든 것을 그릇되게 판단하고 자신의 열정의 대상이 된 인물과 자신을 영원히 함께 묶어버린다. 그런 환상에 빠진 사람은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는데, 그 환상은 종의 의지가 다 충족되고 나면 금방 사라지고 이젠 평생을 혐오하면서 살아야 할 파트너만 남게 된다. 바로 여기서, 매우 이성적이고 심지어 탁월하기까지 한 남자들이 종종 잔소리가 심하고 악마 같기도 한 여자들과 사는 이유, 그리고 그렇게 살면서도 왜 자신들이 그런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를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 가능해진다. 사랑에 빠진 남자는 자기 신부에게서 자신에게 비참한 삶을 약속하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성격적인 혹은 기질적인 결함을 확실히 파악하고 쓰라림을 느낄지 모르지만, 그 문제 때문에 놀라 달아나지는 않는데... 그 이유는 그 남자가 종국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그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아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제 3자의(자녀, 미래) 이익이기 때문이다. 비록 그 남자 본인은 자신이 추구하는 것이 마치 자신의 이익인 것 같은 환상에 빠져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쇼펜하우어의 이론이 암시하는 바에 따르면,  생에 대한 의지가 우리 인간의 행복보다는 의지 그 자체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 더 큰 능력을 발휘한다는 점은 섹스 직후 두 남녀에게 종종 엄습하는 나른함과 슬픔에서 아주 명확하게 감지된다.

섹스를 끝내자마자 악마의 웃음소리가 들린다는 사실을 아직 깨닫지 못했단 말인가?

 

어려움에 처한 존재들을 위하여 (니체)

쾌락과 불만은 서로 단단하게 묶여 있기 때문에 한 가지를 가능한 한 많이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불가피하게 다른 한 가지도 경험할 수 밖에 없다... 당신은 선택을 해야 한다. 불만을 가능한 한 적게 경험하면서 고통 없는 시간을 잛게 기지든지... 아니면 이제까지 좀처럼 누리기 힘들었던, 형언하기 어려운 쾌락과 환희를 즐기면서 그 대가로 불만을 가능한 한 많이 겪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만약 전자의 길을 결정하고 인간적인 고통의 전도를 줄이거나 낮추기를 원한다면 그대는 또한 그 고통이 줄 수 있는 환희에 대한 기대의 수준도 줄이고 낮추어야 한다. .... 가장 훌륭하고 가장 알찬 결실을 남긴 사람들의 삶을 찬찬히 뜯어보면서, 그대 자신에게 악천후와 폭풍을 견디지 못하는 나무들이 장래에 거목으로 훌쩍 자랄 수 있을지 한번 물어보라. 불운과 외부의 저항, 어떤 종류의 혐오, 질투, 완고함, 불신, 잔혹, 탐욕, 폭력. 이런 것들이 호의적인 조건에 속하지 않는지 곰곰이 따져보라. 이런 것들을 경험하지 않고는 어떤 위대한 미덕의 성장도 좀처럼 이룰 수 없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이라고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들이라고 해서 다 나쁜 것은 아니다.

 

 

알랭 드 보통도 실망시키지 않지만, 철학자들이 그들의 생애를 통해 쏟아낸 고뇌의 한 마디 한 마디는 곱씹어 볼 만한 가치가 충분 한 듯. 추천.

Fine. xthy.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