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사라져가는 시대, 책의 가치를 잃어가는 시대에 종이책을 권하는 한 사람. 김무곤 교수. 그가 전하는 독서 예찬론과 그의 독서 인생에 대한 이야기.

(그림: Girl Reading by Gustav Adolf Henning, 1828)

책 머리말의 첫 단락

지금 당신이 들고 있는 이것은 '책 읽기'에 관한 책이자 '책 읽는 사람'에 관한 책입니다. 또한 이 책은 한 '책 바보'가 책을 읽는 데 바친 수많은 나날을 적은 기록입니다. 또한 이 책은 우연히 같은 시대에 태어나 지금도 어디선가 홀로 책을 읽고 있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응원가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책이 이제 막 책 읽기를 시작한 사람들을 위해 불을 밝히는 등대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종이책 읽기를 권함>은 '사람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독서는 독서 이외의 것으로 얻을 수 없는 가치가 있는가?' '책은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등에 대한 저자 김무곤 나름의 대답과 여러 간서치(看書癡, '책에 미친 바보'라는 의미로, 독서광이었던 조선후기 실학사상가 이덕무가 스스로에게 붙인 별명)들의 이야기들로 구성되어있다.

독서 자체를 권하는 책은 처음 접했기에 독특하고 신선했다. 독서를 강권하는 이야기들이나 위인이나 고전의 이야기만 나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책 읽는 것 자체를 즐겼으면 하는 바람과 본인이 느낀 행복감을 꽤 현실적으로 풀어놓아서인지 전혀 거부감이 없었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기본에 극도로 충실하고 집착하는 디테일에 있다. 저자도 밝혔듯이 많은 시간을 들여 아주 천천히 쓴 책인만큼 여러 부분에서 세심하고 높은 완성도에 놀란다. 작게는 명확한 제목, 북 커버에 등장한 구스타브 아돌프 헤니히의 그림 부터 목차와 문단 구성... 특장점은 본문만큼의 양을 차지한 '각주주, 해설, 출처'. 보통의 각주, 해설, 출처는 책 하단 혹은 책 제일 뒤에 위치하는데 저자는 책 읽는 흐름을 방해하지 않고, 좀 더 깊은 각주와 해설 내용을 싣고자 본문이 왼쪽 페이지이면 오른쪽 페이지에 각주, 해설, 출처를 적었다. 문구를 인용한 작가나 책, 동네 지명, 서점 등에 대한 설명이 있었는데 '인사동'에 대해서만 한 페이지를 쓸 정도니(얼추 책의 2/5를 차지하는 듯), 그 디테일의 정도가 '집착' 수준이라서 본문만큼 흥미롭다.

왼쪽이 본문이고, 오른쪽에 액자 모양의 테두리가 되어있는 부분이 각주, 해설 부분.

 

좋았던 구문들

'지성의 시작' 책 읽기

책을 읽을 때, 우리는 앞 페이지의 내용을 기억하고 그 기억을 지탱해야만 뒤에 나오는 내용을 이해할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책을 읽을 때 사람은 정신의 팽팽한 탄력을 늦출 수가 없습니다. 정신의 팽팽한 탄력을 밀고가는 힘. 이 '지탱력'이야말로 사람이 오직 책 읽기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소중한 자산 입니다. 이것의 다른 이름이 바로 '지성(知性)'이 아닐까요.

우리가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어떤 위정자가 독재자였고, 누가 민주적인 통치자였는지 한 칼에 정의를 내리기 어렵다. 우리 역사에서 광해군에 대한 평가도 엇갈리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가장 손쉬운 독재자 판별법이 있다. 책을 불태운 자가 바로 독재자다. 네로, 진시황, 아돌프 히틀러와 같이 책을 불태운 사람들을 독재자라고 부르는 데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책을 불사르는 자가 빼앗고 없애려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의 상상력, 꿈 그리고 스스로 생각하는 힘이다. 또한 '남과 다른 생각'이며, 남의 말이나 남의 생각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려는 의지'다.

 

고서, 고서점

베이징의 유리창, 도쿄의 진보초와 함께 동아시아 문화의 보물창고로 일컬어졌던 인사동은 최근 관광지화되어 문화공간들이 급격히 줄어들고 국적 불명의 기념품점과 전통음식점을 가장한 사이비 관광식당들이 대거 들어서게 되었다. 고서점까지 집어삼긴 작금의 사태는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나라에서 고서(古書)를 헌책이라 부르고, 고서점을 헌책방이라고 부르는 것을 나는 지독하게 싫어한다. '헌'이란 말은 '오래되어 성하지 않고 낡은'이란 뜻의 관형사다. 고서를 '오래되어 성하지 않고 낡은 책'이라고 부르는 문화 풍토는 선대 인류의 문명을 성하지 않고 낡은 것으로 보는 지독하게 반문명적이고 반지성적인 생각에서 나온다. 이는 고가(古家)를 헌집이라고 부르는 것과 다름없다.

 

독자의 권리

프랑스의 교사이자 작가인 다니엘 페나크는 '책을 읽다'라는 동사가 '꿈꾸다' '사랑하다'와 함께 명령어로 바꿀 수 없는 단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꿈꾸는 것, 사랑하는 것, 책을 읽는 것 모두 명령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페나크는 책 읽기를 보다 친근한 일로 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독자의 10가지 권리를 제창하고 있다.

  1. 읽지 않을 권리. (나는 기분이 좋지 않거나 장정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여하튼 읽고 싶지 않을 때는 안 읽는다.)
  2. 건너뛰어서 읽을 권리. (새로 발간된 전공 서적을 읽을 때 내가 잘 쓰는 수법이다.)
  3. 끝까지 읽지 않을 권리. (괴테의 <파우스트>는 고교 시절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도 다 못 읽었다.)
  4. 연거푸 읽을 권리. (내가 좋아하는 로르카의 시집은 하도 여러 번 읽어서 이제는 거의 다 외운다.)
  5. 손에 잡히는 대로 읽을 권리. (이현세의 만화를 읽다가 갑자기 막스 베버를 읽은들 어떠랴.)
  6. 작중 인물과 자신을 혼동할 권리. (나는 셰익스피어 <햄릿>을 읽으면 햄릿이 되고 또 가끔 홍길동이 되기도 한다.)
  7. 읽는 장소에 구애받지 않을 권리. (침대에서 읽고, 기차간에서 읽고, 수영장에서도 읽는다.)
  8. 여기저기 부분적으로 읽을 권리. (내 특기다.)
  9. 소리내어 읽을 권리. (흥이 겹거나 감동했을 때는 저절로 소리가 난다.)
  10. 읽고 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권리. (책 읽기의 장점 중 하나는 그 즐거움을 혼자만의 비밀로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경계해야할 책 읽기의 고정관념

시내 서점의 아동코너에 가면 부모들이 종종 자녀에게 "만화 읽지 마라" "이건 너한테 너무 쉬워" "이건 너한테 너무 어려워" "하면서 자녀들의 독서 인생을 망치고 있는 경우를 자주 본다. 또 위인전을 읽으라고 하는 부모들이 의외로 많다. 자기는 읽지 않으면서, 그러나 위인전을 읽는다고 위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재미있는 그림책이나 좋은 만화 또는 무협지 한 권이 인생의 지침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가장 좋은 독서지도는 도서관이든 서점이든 책이 많은 곳에 데려가서 아이를 방치하는 일이다. 부모들은 자기 책을 읽으면서 가끔 아이가 있는 곳을 쳐다보면 된다.

"그까짓 영화 안 만들면 어때"라고 말한 사람은 전 생애를 영화에 바친 알프레드 히치콕이었다. 독서도 마찬가지다. 그까짓 책 안 읽으면 어때. 독서인이 모두 곧 교양인이요, 인격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은 환상이다. 수천 권의 책을 읽은 사람이 굉장한 권위주의자라든지 사기꾼인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독서가 곧 교양과 인격의 척도라는 교조주의로부터 자신을 해방하는 일이야말로 즐거운 독서, 책과의 평등한 사귐의 시작일 것이다.

이제 곧 영상매체가 인쇄매체를 완전 대체할 것인가? 대답은 '아니오'가 아니라 '아니 되오'다. 활자매체를 읽음으로써 우리가 얻어온 것을 영상매체에서 모두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활자매체가 식물성이라면 영상매체는 동물성이다. 움직이는 영상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고, 오히려 우리를 삼키려고 의도한다. 읽다가 생각에 잠길 수 없으며, 의심나면 다시 한 번 돌아가서 확인하기도 쉽지 않고, 읽다가 덮어버리기도 어렵다. 책을 읽을 때는 사람이 주인이다. 그러나 영상의 속도에 감정을 맞춰두면 스스로 생각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기뻐하고, 슬퍼하고, 화내는 일을 남의 의도에 내맡기기 쉽다. 책 읽는 일이 사람과 사람 사는 세상을 위해 참으로 중요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책을 읽는 일은 사람이 스스로의 몸과 마음의 주인이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쾌락의 책 읽기

"책 페이지 위로 내 손가락이 부드럽게 스치면서 내는 소리, 앞장으로 되돌아가려고 책 페이지를 주르르 넘길 때 펭지들이 미끄러지면서 내는 소리." - 애너 퀸들런, <독서가 어떻게 나의 인생을 바꾸었나>

종이책이 앞으로 사라지지 않을 이유로 퀸들린이 꼽은 장점은 읽을 때 느끼는 촉각의 쾌감이다. 그렇구나 양손으로 책 한 권을 들고 손가락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때 느끼는 손맛의 짜릿함은 경험해 본 사람은 무슨 말인지 안다. 책장이 스르륵 넘어갈 때 들리는 소리에 청각이 동원되고, 향긋한 종이 냄새까지 맡을 수 있으니 후각이 동원된다. 이토록 다양하게 감각을 자극하는 매체는 흔하지 않다.

 

다른 삶의 간접경험으로서의 즐거움

책 읽기의 쾌락은 간접 경험의 세계가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다. 우리 인생의 생 자체가 시간의 제약을 받고, 어느 순간 끝나게 되어 있는게 아니던가. 사람이 한평생 살면서 만날 수 있는 사람, 가볼 수 있는 장소, 해볼 수 있는 역할은 누구에게나 제한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책 속에서 가볼 수 없는 곳을 가고, 머물 수 없는 시간 속에 머물고,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책 속에서 우리는 시인이 되고, 탐정이 디고, 악당이 되고, 선장이 되고, 그리고 때로 동물과 식물이 된다. 책 속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행복과 불행, 연애와 실연, 성공과 실패를 경험하게 된다. 그러므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책을 천 권 읽은 사람은 적어도 천 번의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다.

로마교구의 마르티니 추기경이 던진 "비신앙인은 어디에서 선(善)의 빛을 찾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에코의 대답은 이렇다. "자기 안에 있는 타자(他者)를 발견할 때 사람은 비로소 '윤리'를 얻는다." 사람은 타자를 인식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육체를 존중하고 그 육체의 확장인 다른 사람의 말, 사상을 인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 책 읽기를 통해 우리는 타자(他者)를 만난다. 내가 다른 사람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독서가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가장 특별한 혜택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살면서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과 자기가 살아가는 시대, 그리고 자기가 몸담은 계층의 벽과 틀을 벗어나기 어렵다. 그래서 자기와 전혀 다른 사람들을 만나기가 어렵다. 그러나 책은 인간에게 주어진 공간과 시간의 벽을 넘어 수많은 인간 유형을 만나게 해준다. 우리는 책 속에서 허락도 약속도 없이 여러 유형의 인간들과 마음대로 만나고, 자유롭게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책 속에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되는 것이야말로 인간을 이해하는 출발선에 우리를 세워준다.

 

고통스러운 책 읽기

책 읽기가 고통스러운 이유는 책은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스스로 통제해야 하는 매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책 읽기는 텔레비전 화면을 보는 행위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을 듣는 텔레비전 화면을 보는 행위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을 듣는 행위와는 달리, 사람의 '적극적 의지'가 필요하다. 책은 스스로의 의지로 스스로를 고양시키려는 행동이 필요한 매체다. … 책은 읽는 사람 스스로가 좌우할 수 있는 매체다. 그러므로 책을 읽을 때 우리는 스스로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다. 납득이 안 되면 몇 번이고 다시 읽을 수 있고, 잠시 덮었다가 다시 읽을 수도 있으며, 책의 내용이 자신의 생각과 다를 때, "이건 내 생각하고 달라"하고 스스로 생각할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아예 멀리 던져버릴 수도 있다. 한권의 책을 온전하게 다 읽은 자는 온전히 그 책의 주인이 된다. 하품과 잠과 고통을 극복하고 스스로의 의지로 책을 읽을 때, 책 읽는 사람은 하나의 작은 우주가 된다. 책읽기는 때로 고통스럽다. 그래도 나는 읽는다.

책을 읽으면 마냥 즐거운가? 그렇지만은 않다. 책을 읽을 때 우리는 행복하면서 동시에 불행하다. 책을 읽을 때 우리는 세상과의 소통과 세상과의 단절을 동시에 경험한다. 책을 읽는 자는 완전한 단독자로서 세계와 맞닥뜨려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책 읽는 일은 구원(救援)인 동시에 좌절이다.

 

다시 읽는 책이 좋은 점

오래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집어들 때마다, '처음 읽을 때 내가 놓친 부분이 이렇게 많았구나'하고 놀랄 때가 있다. 마치 전혀 다른 책을 읽는 것 같은 경험을 할 때도 있다. 이유는 한 가지가 아니다. 우선 처음 읽었을 때 책을 '읽은'게 아니라 '보았기' 때문이리라. 책장을 펼쳤다고 다 읽은 건 아니다.

전에 읽은 책을 다시 읽는 일은 오래전에 갔던 산사(山寺)를 다시 찾아가는 일과 같다. 전에는 안 보이던 빛바랜 단청이며 뒤뜰의 부도탑(浮屠塔)이 어느덧 눈에 들어온다. 몇백 년 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인데 왜 그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일까. 같은 절을 여러 번 방문하면, 무엇보다도 절집 전체의 구도가 머릿속에 그려지고, 뒷산과 대웅전 처마 끝이 맞닿은 풍광이 가슴에 천천히 안겨오게 된다. 책도 이와 같다 오래 사귄 책은 오래된 절과 같다.

 

고전만이 답은 아니다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고전을 쓴 그들은 모두 당대의 일급 지식인, 최고의 독서가들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그들의 경지에 이르지 않은 사람들은 그렇게 되기 위해서라도 남이 지정해주는 고전을 차곡차곡 읽어야 하지 않겠냐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책 읽기는 자칫 '숙제'가 되기 쉽다. 책 읽는 시간은 가장 자유롭고 가장 즐거워야 할 나만의 축제의 시간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할 독서가 고통스러워서야 되겠는가. 무엇을 읽을 것인가. 그것은 어디까지가 읽는 사람이 정할 몫이다.

진리와 인생의 나침반이 고전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한 권의 만화책, 지하철에서 읽은 잡지의 기사 한 편이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는 경우도 있다. … 책 읽기에는 왕도가 없다. 좋은 책 나쁜 책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언젠가 방학 때 읽을 만한 책 몇 권 소개해달라고 찾아온 제자에게 듣기 싫은 소리 좀 했다. "너는 내가 사귀라는 친구와 사귀고, 내가 결혼하라는 사람과 결혼을 할 작정이냐?"

 

작가들 책 읽기에 대한 Quotes

사람은 살아 있으므로 집을 짓는다. 그러나 언젠가 죽을 것을 알기 때문에 책을 쓴다. 사람은 군거성(群居性)이 있으므로 모여서 산다. 그러나 자신의 고독을 알고 있기 때문에 책을 읽는다. 책 읽기는 다른 어떤 것도 대신할 수 없는 친구다. 책을 대신할 친구는 없다. - 다니엘 페나크, <소설처럼>

대부분이 근대소설은 그렇게 세상에 공공연하게 이야기하기는 힘들지만, 바로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참모습이다 싶은 것을 그리고 있다. 그것은 성대(聲帶)의 육성(肉聲)이 아니라 혼(魂)의 육성을 통해 작자의 내면에서 독자의 내면으로 전달되는 것이다. - 히라노 게이치로, <책을 읽는 방법>

내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 - 토마스 아 켐피스

저 위 하늘나라에 있다는 천국은 엄청나게 큰 도서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가스통 바슐라르, <몽상의 시학>

아이는 글을 읽으면 기억하지만 어른은 대부분 기억하지 못하는데, 단지 아이는 마음을 집중하여 하루에 일백 자를 가르치면 단지 일백 자를, 이백 자이면 단지 이백 자를 기억하지만, 어른은 하루에 행여 백 개의 목판을 보더라도 그 처럼 정신을 집중하여 자세히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거의 일분에 십을 보는데, 지금은 마땅히 십분에 일을 보아야 한다. 독서의 기한은 넉넉하게 잡고, 그 과정은 야무지게 해야한다. - 송주복, <주자서당은 어떻게 글을 배웠나>

 

 

올 해 들어 책 읽기를 목표로 삼고 취미로 즐기고자 노력하는 개인적 입장에서는 위로도 되고, 자극도 되며, 새로운 팁을 배울수도 있던 영양분이 담뿍 담긴 내용들로 가득한 <종이 책 읽기를 권함>. 이 책을 많은 이들에게 권함.

Fine. xthy.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