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어울리고, 혼란스런 이 시대에 어울리는 황현산 교수의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

왜 읽게 되었나?

  • 추천 도서로 메모해뒀었다.
  • 구매 전 책 제목과 표지까지 외로움과 남성스러움이 물씬느껴져 좋았다.
  • ‘어르신’에게 뭔가 불안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싶었던 막연한 기분 때문에.

 

내 마음대로 책 내용 요약

  • 문학적, 교육학적,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젊은 정신을 가진 노학자. 본인의 과거와 현재 삶에 대한 이야기.
  • 주제별 3페이지 내외의 짧은 글(칼럼)들로 시대상, 여러 사건들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쉽고 간결하게 알 수 있다.

 

읽을만 했나?

  • (문학평론가, 불문학자인 저자 답게) 문장력이 대단했다. 작은 표현도 문학적이고 관조적이지만 강직한 문체가 좋았다.
  • 위안을 받고 싶었지만, 반대로 정신 차리고 똑바로 살라는 꾸중으로 마지막 책장을 덮었다.
  • 산문집이 그렇듯 저자와 대화하는 듯한 기분. 나는 저자만큼 조국과 직업과 가족과 주변에 애정과 열정이 있는지 반문, 반성하게 된다.

 

인상 깊었던 내용 필사

유신시대. 그 시절에 우리는 모두 괴물이었다. 불의를 불의라고 말하는 것이 금지된 시대에 사람들은 분노를 내장에 쌓아두고 살았다. … 유신시대의 젊은이들은 자기 안의 무력한 분노 때문에 더욱 불행했다.

 

어떤 사람에게 눈앞의 보자기만한 시간이 현재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조선시대에 노비들이 당했던 고통도 현재다. 미학적이건 정치적이건 한 사람이 지닌 감수성의 질은 그 사람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가름될 것만 같다.

 

대학에 입학한 남학생들이 한두 해를 방황 속에 허송하다가 ‘복학생 아저씨’가 되고 나서야 공부에 전념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를 두고 어떤 사람은 군대 생활이 사람을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군대 문제가 해결되기전까지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편이 옳다.

 

지금 이 자리를 모면하기 위해서만 필요한 것이 아닌 일, 언제 어디에 소용될지 모르는 일에도 전념하는 사람이 많아야 한다. … 모든 공부가 많게건 적게건 그 일과 관련을 맺는다. 인문학의 위기는 오래전에 찾아왔고, 그 뒤를 이어 이공계의 위기가 걱정거리다. 따지고 보면 학문의 위기고, 대학의 위기다. 생각을 생산하는 일이 아니라 생각을 소비하는 일에만 매달릴 때 그 위기는 피할 수 없다.

 

종교가 맞닥뜨려 싸워야 할 것은 다른 종교가 아니라 경건함이 깃들 수 없는, 그것이 아예 무엇인지 모르는 마음이어야 할 것이다.

 

사소하다는 것은 세상의 큰 목소리들과 엄밀한 이론체계들이 미처 알지 못했거나 감안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사소한 것들은 바로 그 때문에 독창적인 힘을 가질 수 있다.

 

유연성은 자신감의 표현과 다른 것이 아니다. 무협영화 한 편만을 보더라도 최고의 고수는 가장 유연한 자이다.

 

가지가지 유행은 밖에서 생산된 기호다. 밖에서 기호를 구해 의미의 자리를 메울 때 우리는 항상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아야 한다. 밖의 기호 속에는 스스로 확신할 수 있는 진정한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행의 문화는 열등감의 문화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 놓인다.

 

권태롭다는 것은 삶이 그 의미의 줄기를 얻지 못해 사물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감수성을 잃었다는 것이다. 유행에 기민한 감각은 사물에 대한 진정한 감수성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거기에는 자신의 삶을 구성하는 온갖 것들에 대한 싫증이 있을 뿐이며, 새로운 것의 번쩍거리는 빛으로 시선의 깊이를 대신하려는 나태함이 있을 뿐이다.

 

교수라는 직업이 실랄한 야유 앞에 몸 둘 바를 몰라야 하는 이유는 어쩌면 우리 지식 사회에 깊이 스며들어 있는 근본적인 패배주의에서 찾아야 할 성싶다. ‘어느 세월에’라는 생각, ‘해도 안된다’는 생각이 그 패배주의의 내용이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적어도 이 패배주의를 낱낱이 고발하는 방법을 깨쳤다는 점에서 독창적이다.

 

물질문명의 시대란 역설적이게도 몸이 물질을 누리지 못하는 시대이다. … 우리는 어디서나 단추를 누른다. 옷을 입을 때도 옷고름을 매지 않는다. 글을 쓰기 위해서도 커피를 마시기 위해서도 위층에 올라가기 위해서도 우리는 단추를 누른다. 우리의 육체가 물질과 교섭할 때 느끼게 되는 다양한 감각들은 이제 누름단추의 탄력으로 통일된다. 물질로부터 듣게 될 모든 소리는 이제 딸가닥에 그치는 경쾌한 금속성의 소리로 통일된다. … 우리 같은 문학 선생들이 시나 소설을 가르칠 때 갈수록 힘이 드는 이유 중에 가장 큰 것은 자연 사물에 대한 학생들의 감각이 매우 둔화되어 있다는 데 있다. 몸이 물질로부터 딸가닥 이외의 다른 감각을 느끼는 일은 이제 천한 일로까지 치부되는 실정이다. 소위 3D 업종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탄력과 딸가닥 뒤에 숨어 있는 모든 물질의 감각을 몸으로 느끼고 견디어야 하는 직종들이기 때문이다.

 

컴퓨터나 핸드폰 같은 물건들은 삶을 투명하게 만든다. 내가 어느 구석에 들어가 있어도 그것들은 나를 추적한다. 아니, 그것들이 나를 추적하기 전에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다는 표적을 내 스스로 남겨놓도록 유도한다. … 그러나 사람살이란 묘한 것이어서 우리는 투명한 것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불투명한 것을 획책한다. 산중에 수도하러 들어간 사람은 자신을 물처럼 투명하게 만들러 하면서도 세상이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이 되려 한다. 대도시에 나와 간결하고 명료한 삶을 살려는 젊은이의 욕망에는 또한 자신을 군중속에 감추려는 열망이 함께 따라붙는다.

 

우리는 생각을 말로 표현할 뿐만 아니라 말을 통해서 생각한다. 내가 어떤 것을 한국어로 생각해서 그것을 말하거나 글로 쓸 때, 그 생각이 아무리 복잡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내용과 구조와 깊이는 우리말이 지니고 있는 표현역량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 이 표현역량은 언어마다 다르다. 그것은 언어들 간에 상호 겹치는 부분이 있고 공유 영역을 벗어나는 부분이 있다. 따라서 외국어를 우리말로 번역하는 사람은 때때로 우리말의 표현역량에서 벗어나는 생각을 우리말의 표현역량 안으로 끌어들여야 하는 문제 앞에 서게 된다. 그가 이 작업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우리말의 역량을 그 바닥까지 긁어야 하며, 이 작업이 성공했을 때 우리말은 충격을 받고 그 골격이 다소 흔들릴 수도 있다. 언어역량의 심화, 발전이라는 관점에서는, 번역이 야기하는 이 충격과 요동은 번역으로 전달되는 정보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그러나 이른바 문학적인 번역들, 그러나 실제로는 문학의 찌거기인 상투적 표현에 기대고 있는 번역들은 대게 우리말의 표현 역량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생각들을 제거해버린 가운데 이루어진다. 그래서 처음부터 우리말로 쓴 글보다 더 우리말인 이 번역들은 상투적으로 자연스럽고 상투적으로 아름답다.

 

 

Fine. thy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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