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레에다 감독의 첫 에세이집.

그의 작품들에 왜 이렇게 빠질까. 까칠한 하루키의 에세이가 더 재밌지만, 음미하게 하고 궁금증이 생기는 생각은 고레에다 쪽이다. 신문, 잡지, 그의 홈페이지에 기고한 글들을 기초로 묶은 책이고 그의 이력, 배경, 철학, 원칙, 고민, 지인, 선호, 일상 등이 얕고 잔잔하게 담겨있다. 그렇기에 실린 글들은 그의 팬에겐 신선한 선물, 팬이 아니라면 실망스러울수 있다(남궁인 님도 큰 감흥이 없었다고). 좋았던 몇 개의 문구들을 필사했다.

나는 주인공이 약점을 극복하고 가족을 지키며 세계를 구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영웅이 존재하지 않는, 등신대의 인간만이 사는 구질구질한 세계가 문득 아름답게 보이는 순간을 그리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를 악무는 것이 아니라, 금방 다른 사람을 찾아 나서는 나약함이 필요한 게 아닐까. 결핍은 결점이 아니다. 가능성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세계는 불완전한 그대로, 불완전하기 때문에 풍요롭다고 여기게 된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체가 성숙하지 않았기에 집단을 덮고 있는(외부에 있어서는 폭력으로밖에 부를 수 없는) 단일한 가치관(섬나라 근성)에 무비판적으로 몸을 맡기는 경향이 강하다. 그럼으로써 마음의 평화를 얻은 듯한 착각에 빠진 것이 지금의 일본 사회(세간)의 특징이라고 생각한다.

국가적 가치관과 개인의 가치관, 그 이쪽과 저쪽에 대해 비평적인 입장으로 접근해 타자와의 접촉의 장을 여는 것으로 양자의 성숙(상대화)을 촉진함이 미디어의 역할이라고 생각하지만, 현재는 미디어가 외부에 있지 않고 국가와 개인과 동심원상에 겹쳐있다. 이는 섬나라 근성의 삼중고다. 미디어는 정부의 홍보 도구이며(TV를 오래 보는 사람일수록 자민당 지지율이 높다는 결과가 나왔다), 원래라면 제4의 권력으로서 경찰 권력의 행사를 점검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솔선해서 범인 색출에 협력하고 사법에 앞서 사회적(세간적) 제재를 가한다.

TV는 영화처럼 작가성에 그치는 게 아니다. 그것이야말로 TV 방송의 오리지널리티다. 영화가 악보를 가진 클래식이라면, TV 방송은 재즈다.

TV에서 영화로, 익명성에서 저명성으로 ...

우리가 4개월 전에 경험한 것(동일본 대지진)은, 일본 어느 곳에 사는지에 관계없이, 지금까지 우리가 중요한 것을 외면하고 잊은 척하며 내달려온 문명을 근본부터 되묻는 사건이었다. 그 풍경을 앞에 두고, '미래'나 '안전'보다도 '경제'를 우선시하는 가치관이 경멸스럽다. 사태는 그리 복잡하지 않다. 댐과 도로가 그 지역 사람들의 생활을 풍요롭게 하기 때문이 아니라, 아무리 그것이 쓸데없다 하더라도 그 자체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돈이 움직인다는 식의 구도가, 원전을 둘러싸고도 반복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일반인들의 눈을 흐리는 큰 원인 중 하나는, 신문과 방송이라는 미디어가 벌써 망각 쪽으로 방향키를 돌렸다는 사실이다. 그들 대부분도 역시 기득권층의 이익 안에서 눈이 흐려져버린 것이다.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서는, 실패까지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결국 문화로 성숙된다. 그 시간을 기다리지 않고 망각을 강요하는 것은 인간에게 동물이 되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것은 정치와 언론이 행할 수 있는 가장 강하고, 가장 치졸한 폭력이다

[맨 위로]